이루지 못한 로망

Posted 2010. 2. 2. 19:18

무척이나 추웠던 이번 겨울도 이제 그 끝이 보이는듯 합니다. 여느해 보다 혹독히 추웠기 때문에 더 간절히 봄을 기다리는건지 모르겠습니다. 어머님의 품 속같은 따스한 봄볕의 기다려집니다.

자동차나  전자기기 같은 첨단 기기가 남자의 로망이라면 여자의 로망은 명품브랜드의 핸드백, 옷, 귀금속 액세서리가 아닐까 합니다.


20여년 전 중년에서 초로로 접어든 어머니의 로망은 단연 "모피"였습니다. 무척이나 가지고 싶어하셨습니다. 이 정도 나이되면 그 정도 하나 쯤은 가져야 한다는 생각이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일은 저질러야 하는 법이죠. 어머니와 잠실의 L백화점에 갔습니다. 매장마다 좋아보이는 옷도 많이 있었지만 어머니에게 필이 꽂힌 것은 어느 매장의 쇼윈도우 마네킨에 입혀져 그 매장의 가치를 은근히 드러내던 "블랙그라마 롱코트"였습니다. 사본 개인 물품 중에서 가장 고가가 아니였나 생각됩니다.

어머니는 집에서 몇 번이나 입어봤는지 모릅니다. 행복해 하셨습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그해 겨울은 모피코트를 입을 정도로 춥지를 않았습니다. 윤기가 반지르한 털을 쓰다듬으며 아쉬워 하곤 했습니다. 그해 겨울은 그렇게 입어보지 못하고 지나갔습니다.

이듬해 겨울도 그다지 춥지 않았습니다. 아쉬워하셨죠. 그즈음 출가한 누님이 새 아파트로 입주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새 아파트에 들여놓을 가구를 친정 어머니인 어머니와 상의할 무렵, 드디어 기다리던 한파가 몰아 닥쳤습니다. 따뜻하다 갑자기 추워서인지 체감 추위는 대단했었습니다. 어머니에겐 반가운 추위였습니다.

어머니는 누님과 가구를 보러 논현동으로 가신다고 좋아했습니다. 누님이 새 아파트에 당첨된 것 때문만은 아니였습니다. 그 아파트에 새 가구를 들여놓는 설레임 때문만도 아니였습니다. 모피코트를 입을 기회가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였습니다.

누님과 가구를 보러가기로 약속한 그날, 모피코트를 입고 논현동 가구거리를 거닐었어야 하는 그날, 사무실에 있던 저는 아산병원으로 빨리 오라는 급한 전화를 받았습니다.

어머니의 뇌출혈은 이 세상의 끝이였습니다.
모피코트를 입고 거리를 활보하는 희망도 매서운 겨울 바람에 쓸려 날아가 버렸습니다.

어머니의 유품 중 옷가지의 대부분은 정리했지만 한번도 입지 않은 모피코트는 정리하지 못하고 옷장에 그냥 걸려있었습니다. 옷장 안에서 잊혀져 가고 있었습니다.

두해쯤인가 지났나 봅니다. 옷장에 하염없이 걸려있는 그 모피코트가 눈에 띄길래 어버지에게 말했습니다.
"이거, 애미에게 주는게 어때요?"
"그래라"

그래서 그 모피코트는 며느리인 바울라의 차지가 됐습니다.
하지만 중년부인에게 어울릴만한 모피코트가 젊은 바울라에겐 부담이 되는 패션이였던가 봅니다.

바울라에게 말했습니다.
"그럼, 장모님 드리는건 어때?"

그 모피코트는 장모님이 입고 계십니다. 
아마 임자가 따로 있었나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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